동네 세탁소에 고객관리 시스템이 생겼다. 옷을 맡기면 공책에 볼펜으로 적던 일을 컴퓨터가 대신하게 되면서 고객번호가 생겼다. 416번이었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내 머리는 벌써 4.16세월호참사와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내가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고 있음을 누가 알아준 듯 반가우면서도,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겠다던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추궁하는 듯도 했다.
세월호 참사 9주기 기억식에는 장관, 도지사 등이 줄이어 추도사를 하고 여야 정당 대표들도 참석했다. 그러나 그들은 슬픔에 대해 말할 뿐 진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의 과제를 말하며 분노하는 몫은 416가족협의회에만 맡겨진 듯했다. 재난참사를 사회적으로 기억하게 된 변화는 국가 차원의 의례로도 확인되지만 국가가 무엇을 기억하는지는 알 수 없다. 기억한다면 사과할 텐데, 사과도 없다.
세월호참사는 지우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어 기억을 북돋는데, 기억하고 행동하려 해도 손에 잘 잡히지 않아 망각되어가는, 이중의 시간에 놓여있는 듯하다. 우리의 기억은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이태원참사, 그대로인가
작년 가을 이태원참사가 발생하자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참사를 떠올렸다. 112로 다급한 신고들이 쏟아지는데, 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모두 흘려보냈다. 출동하지 않은 이유에 관해 ‘같은 장소에서 신고된 건인 줄 몰랐다’는 엉뚱한 답변 외 밝혀진 것이 없다. 경찰도 용산구청도 당일 핼로윈축제를 찾은 시민의 안전을 고려한 흔적은 없고 마약범죄, 인근의 시위, 골목의 쓰레기들로 골치 아파하는 회의들만 있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에 관해서라면 ‘국가는 없다’는 현실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대로’라는 말에는 함정이 있다. 우리는 분명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태원참사 소식이 전해지면서 피해자를 혐오하는 온라인 댓글들도 시작됐지만 피해자 혐오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호소하는 목소리들도 많아졌다. 세월참사 당시 온라인 댓글이 왜 문제인지 알아차리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던 것과 분명 차이가 있다. 희생자의 가족, 생존자, 목격자들의 트라우마를 걱정하며 치유와 회복을 안내하는 제안들도 발빠르게 나왔다. 재난참사로부터 회복되기 위해 개개인의 위로를 넘은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는 마치 오래 알아왔던 것처럼 체득하고 있었다.
▲출처 : 노동과세계 김준 기자
국가의 모습도 달라졌다. 정부는 참사 발생 직후 국가애도기간을 설정하고 지자체마다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재난참사에 관해 국가 차원의 공적 애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세월호참사 전에는 없던 것이다. 그런데 변화는 딱 여기까지였다. 정부는 분향소를 설치했지만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표기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공무원들이 검은리본을 달도록 했으나 ‘근조’가 적히지 않은 면으로 달라고 했다. 분향소는 누가 누구를 애도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이 영정도 위패도 없었다. 대통령이 매일 분향소를 다녀가는 사진만 남았다.
그대로라기에는 달라졌지만, 달라졌다기에는 그대로라면, 어디쯤에서 멈춰있는지 조금 더 짚어봐야 한다. 세월호참사는 한국사회에서 재난참사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꾸었다. 재난은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원인을 가지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구의역 김군과 김용균의 죽음에서 원하청 구조의 문제를, 신당역 여성역무원 살해사건에서 여성혐오의 문제를 찾아내는 변화는 우리가 세월호참사 이후의 시간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구조적 원인에 대해 누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아직도 모호하다. 이태원참사에서 정부가 굳이 ‘사고’나 ‘사망자’와 같은 말을 쓰도록 한 것은 ‘국가 책임’을 부인하려는 시도였다. 세월호참사 역시 책임을 따져묻고 정의를 실현하는 과제 앞에 멈춰있다.
세월호참사 이후 멈춘 자리
재난참사에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인식 역시 세월호참사 이후 자리잡았다. 우리는 세월호참사를 겪으며 앞선 재난들이 제대로 조사되지 못한 채 수사기관이 주도하는 ‘꼬리자르기’를 반복해왔고 충분히 기억되지도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만큼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에 대한 바람은 간절했다. 2014년 350만 명 넘는 시민들의 서명이 국회에 전달되었고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집요한 탄압으로 특별조사위원회가 결국 해산되었지만 다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진상규명에 나서게 되었다. 선체조사위원회, 검찰 특별수사단 등의 조사활동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이 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점차 관심도 줄어들었다. 왜 그럴까.
‘국가는 없었다’면 어디에 어떻게 없었는지 밝히는 일이 진상규명이다. 그런데 재난참사가 발생한 후에는 국가가 있어야 했던 곳들이 너무 많이, 너무 선명하게 보인다. 세월호의 운항 승인, 출항 전 검사, 침몰 신고의 대응, 해경의 퇴선조치 등. 이태원참사에서도 그렇다. 용산구청과 경찰이 약간의 조치, 일방통행의 안내나 거리 상황 모니터링 등의 조치만 취했더라도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112신고가 들어올 때 위험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조치를 취했더라면 모두 구할 수 있었다. 소방이 구조활동을 시작했을 때 기관 간 협력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이는 만큼만 조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보이는 곳일수록 하급공무원들이 있게 되고 그들의 무능이나 잘못만 부각된다. 마치 다른 사람이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진 상급자들은 빠져나가기 쉽다. 그들에게는, 보고가 늦었다거나 하급자가 지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등 핑계거리가 너무 많다. 현장에서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을 보증하지 못하는 시스템에 대한 상급자의 책임은 사라져버린다. 재난참사 진상규명이 구조적 원인을 밝히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박도형 선전홍보차장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이 미완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은 책임이 제대로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년에 발간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보고서는 방대한 조사내용을 담고 있다. 보고서는 세월호 침몰 원인을 확정하지 못했지만 조사결과를 읽다보면 선체의 결함이 과적 등의 문제와 맞물려 침몰에 이르게 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참사 당시 해경 구조본부가 어떻게 실패했는지도 상당히 밝혀졌고, 참사 이후 청와대와 정보기관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진상규명을 방해했는지도 드러났다. 문제는 이런 잘못이 드러났는데도 해경 지휘부가 법정에서 무죄 판결(2심까지 진행)을 받거나 청와대 주요 책임자들이 면죄되고 있다는 데 있다. 처벌되지 않으니, 잘못이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국가는 마치 선장과 선원을 처벌함으로써 책임을 다한 것처럼 되어버린다. 그러니 조사를 하고도 사건이 해명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질문이 기억을 만드는 힘
재난참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사건의 날짜나 장소, 희생자의 숫자를 기억하는 것에 그칠 수 없다. 어떤 사건이었는지 기억할 때 기억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애도를 위해 진실이 필수적이다. 또한 정의가 실현될 때 진실도 완수된다. 동시에 기억하려는 우리의 의지가 정의에 이르는 힘을 만든다. 이렇게 진실과 정의, 회복과 기억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안전도 마찬가지다. 구조적 원인을 분명히 밝혀야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민동의청원에 열흘만에 5만 명의 시민이 서명했다. 재난참사를 왜 조사해야 하는지 더이상 설명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재난참사를 ‘어떻게’ 조사해야 하는지 질문하기 시작해야 한다.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어떤’ 진상규명이 필요한지 말해야 할 차례다. 또한 재난참사의 책임을 ‘어떻게’ 물을지에 대해서도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범죄사실을 찾아내듯 무언가를 밝혀서 법정에 기소하는 것만으로 재난참사의 책임을 다 물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국가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우리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만큼 국가책임도 분명해진다.
▲출처 : 노동과세계 김준 기자
헌법재판소에서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심판이 시작되었다. 탄핵심판은 이상민 개인이 얼마나 문제적 인물인지를 가리는 심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이태원참사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따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상민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재난안전관리기능을 대표하는 국무위원으로서 심판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권이 있다는 말은 당연하게 들리지만, 국가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무권리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세월호참사 이후 우리가 나아온 시간을 소중히 기억하며 그만큼 다시 나아가야 할 시간을 그려보는 봄이 되길 바란다. 이태원참사 1주기가 되는 가을에 우리가 한걸음 나아가있기를, 세월호참사 10주기가 되는 내년 봄에 우리는 더욱 많은 걸 기억할 수 있게 되기를. 우리는 아직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다 모르지만, 기억하겠다는 의지와 관심으로 기억을 만들어갈 수 있다.
동네 세탁소에 고객관리 시스템이 생겼다. 옷을 맡기면 공책에 볼펜으로 적던 일을 컴퓨터가 대신하게 되면서 고객번호가 생겼다. 416번이었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내 머리는 벌써 4.16세월호참사와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내가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고 있음을 누가 알아준 듯 반가우면서도,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겠다던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추궁하는 듯도 했다.
세월호 참사 9주기 기억식에는 장관, 도지사 등이 줄이어 추도사를 하고 여야 정당 대표들도 참석했다. 그러나 그들은 슬픔에 대해 말할 뿐 진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의 과제를 말하며 분노하는 몫은 416가족협의회에만 맡겨진 듯했다. 재난참사를 사회적으로 기억하게 된 변화는 국가 차원의 의례로도 확인되지만 국가가 무엇을 기억하는지는 알 수 없다. 기억한다면 사과할 텐데, 사과도 없다.
세월호참사는 지우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어 기억을 북돋는데, 기억하고 행동하려 해도 손에 잘 잡히지 않아 망각되어가는, 이중의 시간에 놓여있는 듯하다. 우리의 기억은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이태원참사, 그대로인가
작년 가을 이태원참사가 발생하자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참사를 떠올렸다. 112로 다급한 신고들이 쏟아지는데, 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모두 흘려보냈다. 출동하지 않은 이유에 관해 ‘같은 장소에서 신고된 건인 줄 몰랐다’는 엉뚱한 답변 외 밝혀진 것이 없다. 경찰도 용산구청도 당일 핼로윈축제를 찾은 시민의 안전을 고려한 흔적은 없고 마약범죄, 인근의 시위, 골목의 쓰레기들로 골치 아파하는 회의들만 있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에 관해서라면 ‘국가는 없다’는 현실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대로’라는 말에는 함정이 있다. 우리는 분명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태원참사 소식이 전해지면서 피해자를 혐오하는 온라인 댓글들도 시작됐지만 피해자 혐오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호소하는 목소리들도 많아졌다. 세월참사 당시 온라인 댓글이 왜 문제인지 알아차리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던 것과 분명 차이가 있다. 희생자의 가족, 생존자, 목격자들의 트라우마를 걱정하며 치유와 회복을 안내하는 제안들도 발빠르게 나왔다. 재난참사로부터 회복되기 위해 개개인의 위로를 넘은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는 마치 오래 알아왔던 것처럼 체득하고 있었다.
▲출처 : 노동과세계 김준 기자
국가의 모습도 달라졌다. 정부는 참사 발생 직후 국가애도기간을 설정하고 지자체마다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재난참사에 관해 국가 차원의 공적 애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세월호참사 전에는 없던 것이다. 그런데 변화는 딱 여기까지였다. 정부는 분향소를 설치했지만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표기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공무원들이 검은리본을 달도록 했으나 ‘근조’가 적히지 않은 면으로 달라고 했다. 분향소는 누가 누구를 애도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이 영정도 위패도 없었다. 대통령이 매일 분향소를 다녀가는 사진만 남았다.
그대로라기에는 달라졌지만, 달라졌다기에는 그대로라면, 어디쯤에서 멈춰있는지 조금 더 짚어봐야 한다. 세월호참사는 한국사회에서 재난참사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꾸었다. 재난은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원인을 가지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구의역 김군과 김용균의 죽음에서 원하청 구조의 문제를, 신당역 여성역무원 살해사건에서 여성혐오의 문제를 찾아내는 변화는 우리가 세월호참사 이후의 시간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구조적 원인에 대해 누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아직도 모호하다. 이태원참사에서 정부가 굳이 ‘사고’나 ‘사망자’와 같은 말을 쓰도록 한 것은 ‘국가 책임’을 부인하려는 시도였다. 세월호참사 역시 책임을 따져묻고 정의를 실현하는 과제 앞에 멈춰있다.
세월호참사 이후 멈춘 자리
재난참사에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인식 역시 세월호참사 이후 자리잡았다. 우리는 세월호참사를 겪으며 앞선 재난들이 제대로 조사되지 못한 채 수사기관이 주도하는 ‘꼬리자르기’를 반복해왔고 충분히 기억되지도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만큼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에 대한 바람은 간절했다. 2014년 350만 명 넘는 시민들의 서명이 국회에 전달되었고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집요한 탄압으로 특별조사위원회가 결국 해산되었지만 다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진상규명에 나서게 되었다. 선체조사위원회, 검찰 특별수사단 등의 조사활동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이 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점차 관심도 줄어들었다. 왜 그럴까.
‘국가는 없었다’면 어디에 어떻게 없었는지 밝히는 일이 진상규명이다. 그런데 재난참사가 발생한 후에는 국가가 있어야 했던 곳들이 너무 많이, 너무 선명하게 보인다. 세월호의 운항 승인, 출항 전 검사, 침몰 신고의 대응, 해경의 퇴선조치 등. 이태원참사에서도 그렇다. 용산구청과 경찰이 약간의 조치, 일방통행의 안내나 거리 상황 모니터링 등의 조치만 취했더라도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112신고가 들어올 때 위험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조치를 취했더라면 모두 구할 수 있었다. 소방이 구조활동을 시작했을 때 기관 간 협력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이는 만큼만 조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보이는 곳일수록 하급공무원들이 있게 되고 그들의 무능이나 잘못만 부각된다. 마치 다른 사람이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진 상급자들은 빠져나가기 쉽다. 그들에게는, 보고가 늦었다거나 하급자가 지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등 핑계거리가 너무 많다. 현장에서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을 보증하지 못하는 시스템에 대한 상급자의 책임은 사라져버린다. 재난참사 진상규명이 구조적 원인을 밝히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박도형 선전홍보차장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이 미완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은 책임이 제대로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년에 발간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보고서는 방대한 조사내용을 담고 있다. 보고서는 세월호 침몰 원인을 확정하지 못했지만 조사결과를 읽다보면 선체의 결함이 과적 등의 문제와 맞물려 침몰에 이르게 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참사 당시 해경 구조본부가 어떻게 실패했는지도 상당히 밝혀졌고, 참사 이후 청와대와 정보기관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진상규명을 방해했는지도 드러났다. 문제는 이런 잘못이 드러났는데도 해경 지휘부가 법정에서 무죄 판결(2심까지 진행)을 받거나 청와대 주요 책임자들이 면죄되고 있다는 데 있다. 처벌되지 않으니, 잘못이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국가는 마치 선장과 선원을 처벌함으로써 책임을 다한 것처럼 되어버린다. 그러니 조사를 하고도 사건이 해명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질문이 기억을 만드는 힘
재난참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사건의 날짜나 장소, 희생자의 숫자를 기억하는 것에 그칠 수 없다. 어떤 사건이었는지 기억할 때 기억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애도를 위해 진실이 필수적이다. 또한 정의가 실현될 때 진실도 완수된다. 동시에 기억하려는 우리의 의지가 정의에 이르는 힘을 만든다. 이렇게 진실과 정의, 회복과 기억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안전도 마찬가지다. 구조적 원인을 분명히 밝혀야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민동의청원에 열흘만에 5만 명의 시민이 서명했다. 재난참사를 왜 조사해야 하는지 더이상 설명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재난참사를 ‘어떻게’ 조사해야 하는지 질문하기 시작해야 한다.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어떤’ 진상규명이 필요한지 말해야 할 차례다. 또한 재난참사의 책임을 ‘어떻게’ 물을지에 대해서도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범죄사실을 찾아내듯 무언가를 밝혀서 법정에 기소하는 것만으로 재난참사의 책임을 다 물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국가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우리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만큼 국가책임도 분명해진다.
▲출처 : 노동과세계 김준 기자
헌법재판소에서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심판이 시작되었다. 탄핵심판은 이상민 개인이 얼마나 문제적 인물인지를 가리는 심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이태원참사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따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상민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재난안전관리기능을 대표하는 국무위원으로서 심판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권이 있다는 말은 당연하게 들리지만, 국가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무권리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세월호참사 이후 우리가 나아온 시간을 소중히 기억하며 그만큼 다시 나아가야 할 시간을 그려보는 봄이 되길 바란다. 이태원참사 1주기가 되는 가을에 우리가 한걸음 나아가있기를, 세월호참사 10주기가 되는 내년 봄에 우리는 더욱 많은 걸 기억할 수 있게 되기를. 우리는 아직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다 모르지만, 기억하겠다는 의지와 관심으로 기억을 만들어갈 수 있다.